음악/음악가 이야기

벤자민 브리튼 --- 전쟁 레퀴엠(War Requiem)

허르랭 2014. 1. 7. 16:21

벤자민 브리튼 ---- 전쟁 레퀴엠(War Requiem)
대본 및 연출 : 데렉크 자만(Derek Jarman) 
독창 : 피터 피어스, 가리나 비쉬네프스카야,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합창 : 바하 코럴, 런던 교향악단 합창단 하이게이트 국민학교 합창단
(Highgate Schoolchoir)
런던 교향악단 실내악 : 멜로스 앙상블(Melos Ensemble) 
오르간 : 사이몬 프레스톤(Simon Preston) 
녹음 및 녹화 : 1989년 제작 : Anglo-International(영상), Decca(음향)
디스크 제원 : ADD, 071 215-1 LH 


전쟁의 참혹함을 통해서 인류의 화해를 희구한 requiem [영국의 모차르트]로 
불려지며 영국 현대 음악사를 대표하는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은 이름난 '행동하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철저한 평화주의자로 그
의 생애를 일관하게된데는 어린 시절의 스승이었던 프랭크 브릿지(Frank 
Bridge)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릿지는 세계 제 1차대전을 겪으
면서 전쟁이 빚어내는 학살과 엄청난 피해를 목격하면서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자신의 사상을 어린 제자에게 심어 주었던 것이
다. 

후일, 브리튼은 스승을 일러서 '온화한 평화주의자'로 불렀는데, 이에 비해서 
그 자신은 '행동하는 적극적인 평화주의자'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평화에 대
한 그의 사상을 처음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15세 때인 1915년에 쓴 수필이 있
다. 동물들을 죽이는 사냥을 통렬하게 비난하면서 전쟁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잔혹행위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수필이 주변의 관심을 끌지 못하
자 곧 메어(Walter de la Mare)의 시(詩)를 텍스트로 삼은 가곡을 쓰기 시작하
였다. 그 중의 한 노래는 덫을 놓는 사냥 감시인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어
서, 1936년, 그의 최초의 걸작 관현악곡으로 평가되는 작품 [우리들 사냥의 조
상들(Our Hunting Fathers)]을 썼다. 새와 짐승들에게는 물론 사람들에게 잔
혹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오든(W.H.Auden)의 작품을 주제로 삼은 관
현악 곡이었다. 이 작품은 동시에 유태인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독일에 대한 명
백한 경고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과 작품 활동을 상기한다면 1942년, 브리튼과 피터 피어스
(Peter Pears)가 미국에서 3년간을 보내고(1939년, 시인이자 친구인 오든이 
미국으로 귀화하자 브리튼도 유럽의 불안한 정세를 피해서 피어스와 함께 미
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 돌아와서 참전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법정에 서게되
는 일련의 사건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브리튼이 참전거부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히자 영국 정부는 그에게 [왕립 공군 음악감독]으로 취임
해 줄 것을 제의하게 되고 브리튼이 이를 수락하자 참전문제로 야기된 이 사건
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기에 이른다. 또한 영국 법정은 브리튼과 피어스가 군대
를 위한 연주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서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해 주
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서 우리는 벤자민 브리튼
이 '행동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학자 켈러
(Hans Keller)는 브리튼을 '적극적 평화주의자'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하는 평화주의는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6일전쟁]이 발발 
했을 때 "무기를 드느니 차라리 아랍의 탱크 앞에 드러눕는 것이 낫다"고 이 전
쟁을 비난한데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오라토리오와 같은 웅대한 규모의 합
창음악을 써야 하겠다는 구상은 오랫동안 브리튼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
다. 그러던 중에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原爆)이 투하된 직후 시인 던컨 
Ronald Duncan)의 협력을 얻어서 오라토리오 [내 탓이로소이다(Mea 
Culpa)]를 썼다. 이어서 1948년 1월, 라틴어로 된 레퀴엠 미사를 일부 변형시
키는 독특한 형태의 진혼곡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에 들어갔다. 이러한 구상의 
동기는 거의 성자(聖者)처럼 철저한 무저항 운동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추
진하고 있었던 간디(Mahatma Gandhi)가 암살 당한 충격에 있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대본은 크로짜이어(Eric Crozier)가 맡았는데 가능한 간디의 연설문
에서 발췌하여 골격을 삼는다는 계획이었다. 징용 병사이자 시인인 오웬
(Wilfred Owen)의 시에 곡을 붙인 최초의 작곡가는 브리스(Arthur Bliss)였
다. 

1930년에 [놀위치 축제(Norwich Festival)]에서 초연된 연설자, 합창, 관현악
을 위한 교향곡 [아침 영웅들(Morning Heros)]이다. 이 작품은 1916년의 '솜 
전투(Somme)'에서 전사한 브리스의 동생 캔나드(Kennard)와 제 1차대전
(1914∼1918)에서 숨진 모든 병사들에게 헌정 되었다. 이 작품에서 오웬의 시
는 마지막 악장의 바로 앞에서 내레이션 형식으로 채택되고 있는데 시의 제목
은 [춘계 공세(Spring Offence)]였다. 한편, 브리튼이 오웬의 시를 텍스트로 
삼은 최초의 작품은 1958년에 작곡된 [녹턴(Nocturn)]이었다. 가사는 [친절
한 유령(The Kind Ghost)]에서 취한 것이었다.

같은 해, 그는 BBC에서 역시 오웬의 시 [이상한 만남(Strange Meeting)]을 
발표하기도 했다. 브리튼이 레퀴엠을 쓰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위에서 밝힌 여
러 가지 이유 말고도 공식적인 요청에서도 찾아 진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잉
글랜드 중부 와리크샤주(州) 코벤트리에 소재한 코벤트리 대성당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당이었다. 그런데 이 성당이 1941년에 독일기의 
폭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후 오랜 세월 복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가 1962
년 5월에 드디어 새로 지은 대성당의 헌당식(獻堂式)을 갖게 되었다. 이 역사
적인 헌당식을 위한 축제도 함께 마련 됐는데, 그 중의 한 작품을 작곡해 주기
를 브리튼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의뢰를 받은 브리튼은 이 축제야말로 평소 자
신이 품고 있었던 평화주의를 표현하는 대규모의 합창음악을 발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인류의 화해를 위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
해서 독창자의 선정을 2차대전의 당사국들인 영국, 러시아, 독일인으로 구성한
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의 소프라노 가리나 비쉬네프스카
야(Galina Vichnevskaya), 영국의 피터 피어스(Peter Pears), 독일의 피셔 디
스카우(D.F.Dieskau)가 독창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가리나의 출연을 러시
아 정부가 반대했기 때문에 그 대신 영국의 소프라노 히더 하퍼(Heather 
Harper)가 초연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앞에서도 기술한 것처럼 군대에 입대하기를 거절할 만큼 철저한 평화주의자
인 브리튼이 오웬의 시 가운데서도 그가 휴전 1주일 전까지(오웬은 휴전 1주
일 전에 2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실제로 겪었던 전쟁의 적라나한 상황들과 전
장(戰場)의 소리들(총알이 나는 소리, 총신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신호 나팔 
소리 등)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사실은 일견 납득하
기 어려운 설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들과 표현들은 그가 전달하고
자 했던 메시지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브리
튼은 [전쟁 레퀴엠]의 모토를 악보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이 역시 오웬
의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의 주제는 전쟁과 전쟁의 슬픔이다. 시는 전쟁의 
슬픔 속에 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오늘의 모든 일은 경고하는 것이다." (My 
subject is War and the pity of War. The poetry is in the pity. --- All a poet 
can do today is warn.) 

이 작품은 초연 되기에 앞서 The Times紙의 음악 평론가 윌리엄 만(William 
Mann)에 의해서 브리튼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았다. 또한 대중적
으로도 큰 인기를 모아서 이 작품의 음반이 발표되자마자 불과 5개월만에 20만
장이 팔려 나갈 정도였다. 1962년 5월 30일, 코벤트리 대성당에서 있었던 초연
은 강렬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현장에 있었던 청중보다는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었던 청취자의 경우가 더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브
리튼이 의도했던 데로 음악이 갖는 강렬한 치료효과를 통해서 인류의 화해를 
성취 시켰던 것이다.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을 영상화시킨 자만(Derek Jarman)의 연출은 그저 놀라
울 뿐이다. 영상이 주는 호소력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터이지만 자만
이 이 LD에서 보여주는 전쟁의 비극은 브리튼의 메시지와 어울려서 더할 나
위 없는 강렬한 충격으로 감상자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늙은 병사(로렌스 올리비에 扮)의 회고로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는 영상
은 연출자 자신이 쓴 시나리오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 전쟁의 비참한 실상
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만은 병사(무명, 독일, 失明), 간호사, 어머니, 사업가, 
소녀, 아이들, 전투, 참호, 시체, 해골 등 필요한 모든 등장 인물들과 상황들을 
충실하게 동원하고 있다. 젊은 나이에 전사한 젊은 병사(아마도 그는 오웬일 
것이다)의 시신이 제단 위에 눕혀져 있고 그 옆엔 촛불 하나가 타고 있다. 이 
그림과 더불어 사자(死者)의 안식을 기원하는 레퀴엠은 시작되고 간호사는 죽
은 병사의 철모를 들고 오열과 통곡을 반복한다. 그 사이 죽은 병사의 생전의 
모습들이 파노라마로 처리된다. 여기에서 오웬의 시가 테너 독창으로 불려지
고, 징병된 장정들의 훈련 모습, 참호를 구축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
다. 그리고, ---- 싸움에 지친 병사들의 기진맥진한 모습. 부상병을 수용하고 
있는 야전병원의 비참한 장면들 --- 중상을 입은 병사의 진흙 투성이의 옷을 
잘라내는 끔직한 장면 ---- 부상병을 위한 한때의 유쾌한 위문공연 ---- 이런 
잡다한, 그러나 너무도 가슴 아픈 씬(scene)이 교차되면서 전쟁의 실상을 고
발한다. 

많은 영상들이 전쟁을 고발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처구니없는 에피소
드 한 토막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추운 겨울, 병사들이 발을 동동 거릴 만큼 
그렇게 추운 겨울이다. 한 영국군 병사가 병영의 어느 마당에서 피아노를 친
다. 이를 우연히 발견한 독일 병사. 한동안 피아노에 귀를 기우리더니 총을 놓
고 영국 병사의 등뒤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그의 손에는 한 덩이의 눈 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적군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고 그 독일 병사는 눈싸움이 하
고 싶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 모습을 영국군 장교가 발견하고 독일 병사를 향
해 권총을 쏘았다. 막 눈덩이를 던지려던 순간 손에 총을 맞은 독일 병사는 본
능적으로 칼을 빼어 피아노를 치고있던 영국군 병사를 찔러 죽이고 그 자신은 
뒤에서 달려든 영국 장교가 휘둔 대검에 난자 당해 죽고 만다. 한 순간의 평화
도, 한 오라기의 인간적 호의도, 참으로 용납되지 않는 어이없는 전쟁의 참상
을 자만은 이 한편의 우화(寓話)로 우리를 전율케 한다. 여기엔 킬링필드
(Killing Field)의 유골들,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참상도 인서트 되
고 있다. 그런가하면 1920∼1930년대에 드라이어(Carl Dreyer)에 의해서 편집
된 영화 [잔다르크]와 중국 현대 영화의 몇 장면에서 인용한 엄청난 포화(砲
火)와 잇달은 주검들이 콘트라스트 된다.

많은 레퀴엠 영상음반들이 발표되었지만 이 LD처럼 음악에 결코 못지 않은 감
동과 충격의 영상으로 전쟁의 잔혹상을 고발한 경우는 처음이다. 어쩌다 한·두
장 자료로 끼여드는 영상이 아니고, 브리튼이 전쟁 레퀴엠을 통해서 소리 높
이 외치고 있는 평화주의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자만은 엄청난 제
작비(90분간의 영상 중에서 90% 이상은 실제로 촬영한 것이다.)를 투입해서 
이 영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디스크야말로 여타의 실황녹화 디스크
와는 차별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사족(蛇足) : 애초에 브리튼이 계획했던 초연 
당시의 독창자 가리나 비쉬네프스카야가 이 디스크의 독창자로 선정되고 있
는 점에 유의하자. 실제로는 가리나가 초연에 참여하지 못했지만(이유는 본문
에 있다) 디스크를 내면서라도 작곡자의 의도를 반영하려는 제작자의 결의가 
가상하다.

**  출처: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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